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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알리섬 | 기울어진 술잔
    COLLABORATION/WRITING 2018. 12. 28. 11:49



    주의 : 이 글에는 캐릭터 붕괴 요소가 존재합니다. 이 요소를 지양하시는 분들은 읽음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안고 다시 엎드렸다가 고개를 부스스 드는 걸 반복했다. 최근에 머리가 띵하고 눈앞이 핑 돌 정도로 술을 마신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있다 한들 본인이 기억 못 하는 거겠지만. 이마에 닿는 붕대의 부드러우면서도 까끌까끌한 감촉이, 오히려 편안함을 주곤 했다. 말없이 걸상을 바라보다가 술잔 안에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살짝 녹아서 물방울이 겉도는 부자연스럽게, 어쩌면 비현실적으로 동그란 얼음이 오사무의 손을 맞이했다. 오사무의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손가락의 끝은, 얼음을 아주 살짝 녹였다. 컵 겉면에 고여있던 수분은 이내 스륵 떨어지더니 받침대에 뉘어졌다. 기지개를 필 힘도 없는 나머지, 그냥 또 엎드리고 말았다. 반도 마시지 않은 술은, 물과 섞여서 마시기 꺼려지게 됐다. 술을 남기고 루팡을 나온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서, 오늘도 역시 다 마시지 않고 발걸음을 돌렸다. 사람의 온기가 사라진 자리에 남겨진 술잔은, 이상하게도 쓸쓸하지 않아 보였다. 술과 함께 쓸쓸함을 공유했지만, 오히려 그 쓸쓸함을 녹여서 증발시킨 것 같았다. 눈을 끔뻑이니 세상이 살짝 핑 돌았다. 미친 듯이 웃거나 그런 건 아니었고, 그냥 더욱이 차분해진 기분이었다. 약간 습기가 돌고 있는 눈을 눈꺼풀을 내림으로써 한 번 더 적셨다.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듯이 고였지만, 흐르진 않았다. 다만 싸늘한 바람이 파고들어 머리카락을 흩뜨려놓을 뿐이었다. 여미지 않은 코트 속으로 바람이 훅 들어와서 절로 몸이 움츠려졌다. 막혔던 숨을 간신히 내쉬고 입 밖으로 낸 단어는 추워..라는 단순한 말이었다. 하지만 이 말에는 그 누구도 응답해주지 않았고, 지직거리는 루팡 전조등에 담긴 남자의 그림은 그저 웃는 채로 가만히 있었다. 마치 홀로 외로이 남아있는 오사무의 처지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이. 하기야 어찌하랴, 그랑 같이 오던 곳이었는데, 이제는 바뀐 모습으로 혼자 올 뿐이니까. 술과 함께 나눌 이야기도 없었고, 같이 나눌 온기조차 없었다. 혼잣말하고, 술잔을 꼭 쥐면서 얼음을 녹일 뿐이었다. 생각을 그리하니까 얼음이 녹아서 달그락거리는 청명한 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것 같았다. 환청이라 여기고 정신을 차리기 위하여 고개를 드니, 찬바람이 훅 내려왔다. 익숙해졌는지 몸을 움츠리지도 않고 그저 입만 벌린 채로 있었다. 숨을 내쉬니 하얀 입김이 새어 나왔다. 계절은 당연시하게도 겨울이었다. 계절 감각이 딱히 둔한 건 아니지만 오사무는 두꺼운 겉옷이 아닌 트렌치코트 하나만 걸치고 있었다. 감기란 게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었지만, 단순히 자신의 몸에 대한 애정이 1도 없다는 것이었다. 또다시 흰 입김을 내쉬면서 멍하니 하늘만을 보고 있었는데, 별 한 점 없고 누가 갉아먹은 것 같은 초승달이 보였다. 초승달뿐만이 아니라, 희끗희끗하고 뚫리지도 않은, 길고 가느다란 구름이 떠다니고 있었다. 구름도 달도 무언가가 빠져나간 듯, 외로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 것 같았다. 매끄럽지도 않고, 울퉁불퉁하고 볼품없게 갉아 먹힌 모습이었다. 전혀 남 일 같지 않았다. 하늘이라는 이름의 거울이라도 본 걸까,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쓰린 듯이 아팠다. 다른 사람이 보면 밤하늘이 별 한 점 없지만 예쁘다고 할 터인데, 전혀 아니었다. 항상 붉은 달만 바라봐서 그런지, 약간 푸른빛을 띠는 희고 공허한 달이 이질감이 들었다. 것도 초승달이라니, 눈에 담을 수 없는 것 같았다. 슬픈 피아노의 선율이 흐르는 것처럼 기분이 울적해졌다. 술을 많이 마셔서 그리 된건가, 아니면 자신을 본뜬 듯한 하늘을 봐서 그런 건가. 집에 가고 싶지는 않았다, 아니 못 갔다. 발걸음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신발 밑창이 땅바닥과 일체화라도 된 것처럼 움직일 수 없었다. 꿈인 건가 싶었지만, 술에 취한 감각이 너무나도 선명해서 눈을 감고 쓰러질 수도 없었다. 눈을 감으면 잠에서 깨어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그렇기엔. 목구멍을 넘어간 술 온도도, 손에 닿은 술잔의 싸늘함도, 몸을 스쳐 갔던 찬바람의 냉함도, 루팡의 알 수 없는 기운도 전부 선명했다. 게다가 꿈이라고 할 수 없는 이유가, 눈에 보였던 것이 꿈에서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일이었다. 그와 반대로, 꿈을 꾸면 항상 보였다. 제 품에서 죽은 그가. 항상 영양가 없지만 재미있는 대화를 나눴고, 아무것도 아닌 상황이었지만 웃었고, 우스갯소리를 주고받기도 했다. 그때 오사무는, 눈에 붕대도 감지 않았고, 검은 정장에 겉옷을 걸치지도 않았다. 밝은 색조의 트렌치코트를 입은 상태였다. 특이점이 있다면, 그도 웃고 있었다. 웃는 모습을 잘 보이지 않던 그가, 엷지만 웃고 있었다. 오사무는 그런 그를 보며 홍조를 띠고 있었다. 평생 드러나지 않을 것 같았던 홍조가, 이상하게 꿈속에서는 잘 드러났다. 그 홍조를 보면 놀라서 깨어나는 경우가 다수인데, 항상 깨어난 걸 후회한다. 깨어나기 전에 이 말을 했으면 좋았을 텐데, 왜 물어본다는 걸 깜빡했지, 왜 말을 못 했지. 왜 항상 우스갯소리로 말을 이어가는 거지. 평생 후회하지 않을 것 같은 인생이었는데, 꿈 하나로 후회를 느꼈다. 타인에게 과장된 모습을 보여도, 마음 한편에서 그 얼굴이 사라지지 않았다. 어째서일까, 보통 꿈이란 것은 금방 잊히는데. 왜 사라지지 않는 걸까. 오히려 더 선명하게 그려지고, 눈앞에 아른거리기도 한다. 환각에 시달리는 것도 아닌데, 아니 어쩌면 맞음에도 불구하고 부정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째서 이러는 걸까, 18살 때 이후로 제대로 생각하거나 회상하거나 그런 적이 없는데, 최근 들어서 자주 보였다. 마치 제대로 생각해주지 않아 그 서운함이라도 드러낼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렇다고 그리 확신 짓기엔 이상했다. 자주 생각해줄게. 라고 혼자서 마음속으로 말을 전해도 계속 나왔다. 이러니까 꿈에서 두 번 다시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사람 같아서 이질감이 들었다. 마치 싫어하는 사람이 빨리 죽길 바라는 것 마냥, 아니. 그건 아니었다. 오히려 죽으려고 하는 순간에 필사적으로 붙잡으려 한 게 누구였더라, 밝은 옷이 아닌, 검은 옷을 입고 있던 그였다. 검은색이라 하면, 이미 완전히 더러워졌다는 것을 뜻하는 거였고, 피비린내는 나지만 티는 안 나는, 그야말로 마피아 간부의 모든 것을 의미하는 색이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그 색이 밝아질 길은 없었다. 계속 범죄를 쌓아나가고, 모두가 두려워하는 존재로 변질하고, 하다못해 보스마저 두려워했다. 유일하게 두려워하지 않은 존재는, 그의 하나뿐인 벗뿐이었다. 두려워하지 않는 벗이란 존재가 뿌린 물감은, 바로 스며들었다. 붉은색도, 검은색도 아닌, 빛의 하얀색이었다. 그 뒤로, 평생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 검은색은 한구석에 고이 접어두고, 하얀색을 표면에 드러내고 산 오사무였다. 하지만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하얀색은 한계가 있었다. 잘 숨겨둔 줄 알았던 시꺼먼 속내가 드문드문 드러난다는 것이었다. 특히 마피아와 우연히 만날 때. 그 양은 최대치를 찌른다. 하기야 그게 당연하게 느껴지는 게, 잘 변하지 않는 것이 사람이고, 상처를 받으면 그것은 작든 크든 거의 평생 트라우마로 남는다. 트라우마와 대면하면 절로 도망가고 싶은 게 진실이지만, 오히려 그걸 티를 내지 않으려고 일부러 검은 속내를 드러내는 것 같다. 남몰래 숨겨둔 두려움은, 계속 숨겨두고 있었다. 아무한테도 그 두려움을 내비치지 않았다. 있다 한들,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다. 시간이 제법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일어나는 모든 일이 가끔 꿈이라고 자각되며, 얼른 깨어나려고 아등바등 발버둥 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현실에 불과했고, 가끔 자각몽을 꾸는 수준에 그쳤다. 검붉은 눈물을 흘리며 계속 깨어날 뿐이었다. 눈물을 흘리는 이유가, 그 장면은 단지 꿈에 불과하지 못해서였다. 현실에서 절대 일어나지 못할 일이라고 각인 찍는 것 같았다. 어째서? 라고 꿈에 질문을 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침묵이었다. 흔적이 한 개도 남질 않았다. 있다 해도, 4년이 지나서 살짝 구겨진 사진뿐이었다. 가운데에서 특징이랄 게 없는 표정으로 술잔을 든 채 카메라에 응시한 모습으로 찍힌 그는, 그대로 사라졌다. 이제는 목소리도 들을 수 없고, 온기를 느낄 수도 없었다. 다시 한 번, 얼굴을 만지면서 따스한 웃음을 보여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싸늘한 묘비가 알려주고 있었다. 묘비를 등받이 삼아 앉으면 등이 차가웠고, 삽시간에 전신이 추워서 오한이 들 정도였다. 땅에 묻혀있다 하더라고 이곳에 있으면서 얼마나 많은 감정을 스쳐 간 걸까, 얼마나 많은 양의 비를 맞고, 따스한 햇볕을 얼마나 받고, 싸늘한 눈송이를 몸에 담아두고, 몸이 날아갈 것 같은 바람을 보고, 그러면서 말도 못하고, 눈조차 끔뻑이지 못하고, 숨도 못 쉬고, 얼마나 답답했을까.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저 눈만 감은 채로 누워있는 게, 처음부터 끝까지 다 싫을 텐데, 이 행위를 4년 동안 하다니, 절로 서러워졌다. 눕더라도 같이 눕고 싶었고, 자더라도 같이 자고 싶었다. 손 한 번 더 잡아볼 걸, 작더라도 손에 느껴진 온기는 몸 전체를 잠식할 정도로 너무 좋았다. 아니, 그냥 손을 잡은 것 자체만으로도 좋았다. 원래부터 이런 감정이었던가 했는데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저 곁에서 우스갯소리를 들어주고 짧게 반응해주는 것만으로도 너무 좋았다. 좋아서 금방이라도 울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기쁨의 눈물을 흘릴 수 없었다. 기쁨이라는 감정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고, 그게 어떤 것인지, 어떻게 해야 느낄 수 있는 것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눈물을 흘리는 법을, 옛날에는 그것조차 알지 못했다. 눈물은 어떻게 흘리면 되는 걸까, 어떡하면 속 시원하게 울 수 있을까, 어떡하면 몸 안에 있는 모든 더러운 감정들을 내보낼 수 있을까, 시간 잡아서 길게 생각한다기보다 그냥 드문드문 생각하는 게 더욱 편했다. 그게 더 집중이 편했기에. 하지만 답은 나오질 않았다. 평생 모르는 대로 살았다. 하품하다 나오는 눈물은 눈물 취급조차 하지 않았다. 누군가랑 같이 있어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을 그 눈물이 자리 잡아서 나오지 않는 건가. 한숨을 푹 쉬다가 다시 하늘을 바라봤다, 오사무의 눈은, 정말로 돌덩이 같았다. 달빛이 비치던 그 생기는 온데간데없고, 또다시 휘몰아 찬 그리움과 슬픔, 서러움, 무력감 등등이 교차해서 눈에 있던 생기를 몰아냈다. 돌덩이가 된 눈은 아무것도 담질 못했다. 아무것도 보이질 않고, 귀마저 막혀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의 세계에 있는 것 같았다.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홀로 있는 세계. 하지만 이 세계가 낯설지는 않았다. 오히려 매우 익숙했다. 어렸을 때부터 거기서 산 것처럼, 매우 익숙하게 대했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그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건 당연하게도 아니었다. 그저 마음속에 자주 둔 세계일뿐이었다. 여러 개의 부정적인 감정이 이내 한 구석에서 어두운 세계를 만들었고, 오사무는 그 곳에서 방황했다. 계속 그곳에서 진심을 썩히고, 감정을 멀리하고, 혼자 숨만 내쉬고 살았다. 하지만 그게 싫고 좋지 않은 것이라고 인식하진 않았다, 오히려 그걸 당연하게 여겼는데, 오늘따라 너무 이상했다. 도대체 뭘까, 하는 생각을 한 순간 고개를 돌려보니 익숙한 물건이 보였다. 벽에 달려있는 공중전화가 눈에 띄었다. 꽤나 낡은 모습을 한 공중전화는, 알게 모르게 기억 저편의 한 장면을 꺼내고 있었다. 그리 생각하니까 한 사람의 형상이 보였다. 눈을 끔뻑이고 자세히 보니까, 검은 외투를 어깨에 걸친 다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 4년 전의 그였다. 고개를 푹 숙인 모습은 왜소해 보였다. 절로 안쓰러워졌다. 하지만 형상뿐 이라서 말을 걸지는 못하고, 그저 옴짝달싹 못하고 지켜볼 뿐이었다. 4년 전에 내가 저기서 뭘 했더라, 천천히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 4년 전의 그는, 제대로 피지도 않은 손으로 전화기를 잡아 귀에 천천히 가져다 대고, 번호를 누르고 있었다. 누구였더라, 그때 전화를 걸 법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애초에 전화기가 있었기에 굳이 공중전화를 이용하지 않았다.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아 그저 표정을 보고 알아내야 했다. 4년 전의 그는, 전화기 너머 사람이 전화를 받았는지 이내 표정이 밝아졌다. 그런데, 바로 밝다 라고 단정 짓기가 매우 어려웠다. 더욱 단호하게 말하자면, 밝은 표정이 아니었다. 그냥 눈이 슬 커지며 떨리는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이었다. 그 표정은, 슬픔이었다. , 이제야 생각났다. 저때는 그가 죽은 지 며칠 지났고, 오사무가 전화를 걸던 상대는, 죽은 그였다. 분명 귀에서는 없는 번호라는 처절한 수신음 이였지만, 오사무는 그 목소리를 그의 목소리로 받아들이고 [ 안녕, 오늘은 늦게 받았네.. ] 라고 홀로 중얼거렸다. 이제 와서 보니, 전화를 하는, 아니 혼자 전화기를 귀에 대고 중얼거리는 모습이 참으로 서글펐다. 오사무는 표정을 일그러뜨리다가 시선을 홱 돌렸다. 숨이 거칠어지고 동공이 갈 곳을 잃었다. 금방이라도 주저앉고 싶었다, 본인이 그랬다는 사실이 너무 부끄럽고 싫은 게 아니라, 그 정도로 놓지 못한다는 거였던가 해서 그 비참함에 치가 떨렸던 것이었다. 그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어린애도 아니고, 대체 뭘까 싶었다. 몸만 자란 어린애 같았다, 아직 보호자의 동반이 필요한 어린아이. 한 번이라도 보호자의 손이 떨어지면 불안해하고 엉엉 울어버리는 어린아이 같았다. 양 손으로 얼굴을 푹 가리고 허리를 숙였다가 다시 피니까, 그 형상은 사라지고 없었다. 짧게 했던 전화라서 오래 자리 잡지는 않았다. 처음 며칠은 그가 죽었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한동안 사람이 아닌 것처럼 다녔다. 감정도 표출하지 않고,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매우 어중간한 그런 모습이었다. 추스르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혼자 분열하고, 괴로워하고, 부정하고, 날뛰고, 그렇게 지낸 게 참으로 오래된 일 같았다. 몸은 제아무리 빛의 세계에 있지만, 아직 마음은 어둠 속에 자리 잡았다. 그리 생각하니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슬펐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손에 물방울이 있었다. 빗방울인 줄 알고 고개를 들어봤지만 하늘은 깨끗했다. 그리고 반대로 눈은 따듯했다. ? 하는 마음에 눈을 끔뻑이니까, 무언가가 주룩 흐르고 있었다. 떨어진 액체는 오사무의 구두에 툭 떨어져 이내 바닥으로 미끄러져 스며들었다. 그 액체들은 계속 흐르고 있었다. 눈물이 무엇이고, 어떻게 흘려야 하는지 몰랐던 오사무는, 술에 취하고, 처참한 밤하늘을 보고, 여러 감정이 교차해서 오사무를 누르고, 4년 전 본인의 서글픈 모습을 보고 나서야 눈물을 흘렸다. 그렇다고 속 시원히 울지는 못했다. 그저 눈물이 몇 방울 흐르는 것으로 그쳤다. 시야가 일렁이고 모든 것이 아른거리고 뒤틀렸다. 그리고 그 혼란스러운 시야는, 눈물이 흐르자마자 흐릿했다가 이내 멀쩡해졌다. 이 몇 방울이 정확히 몇 방울이 몇 초 동안 흐르고, 얼마나 땅에 스며들었는지 셀 수 없었다. 찬바람은 아직도 불고 있어서 눈물이 지나간 자리가 점점 아려왔다. 하지만 그걸 아프다고 하지도 않았고, 그 자국을 닦아내거나 손으로 비비지도 않았다. 눈물이 지나가서 생긴 자국조차 없애고 싶지 않았다. 정말 쓸데없는 미련 같지만, 눈물 자국을 지우면 그가 영원히 떠나버릴 것 같았다. 구시대적인 발상도, 어린애 같은 발상도, 생각 없는 사람의 발상도 아니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흔적을 남기고 싶어하는 작은 발버둥이었다. 여기 살아있다고 말하는 거라 치고는 뭐랄까, 너무 비참해서 이질감이 들었다. 살아있다 한다면, 그가 원한대로 좋은 쪽의 사람이 되어서 말하는 게 진짜이지 않을까. 그럼 지금으로써는 어떤 문장이 정답일지 생각하다가, 없으면 못 견디는 게 바로 그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는 대답을 듣지 못하고 목소리조차 듣지 못한다. 돌아가서 술을 더 마신 후에 하늘을 다시 보고 말할까 고민도 했지만, 지금 상태로 마시면 바로 게워내고 싶은 충동이 들 것 같아서 기각하기로 했다. 양주나 그런 것이 아닌, 그냥 맑은 정종류를 마셔야 하나 싶기도 했다. 매우 드문 경우지만 다음날 술병이 날 정도로 술을 마신 날은 꿈을 꾸지 않았다. 지금 상태에서 잠이 들면 분명 꿈을 꿀 터이고, 또 그를 만나게 되면 울 것 같았다. 이렇게 굴어서 미안하다는 이유로. 숨을 푹 내쉬니까 안에 있던 무언가가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붙어있을 줄 알았던 발이 바닥에서 떨어지면서 그제야 발걸음을 집으로 옮긴 오사무였다. 결국엔 집에 가서 술을 더 마시기로 했다. 왜 그리 결정했는가, 이유는 너무나도 간단했다. 최근에 항상 그가 나오는 꿈을 꿨기에 이번에도 꿈에서 그가 나올 게 거의 확실했고, 심지어 울기까지 했기에, 만약 오늘 꿈에서 또 그를 만나면 울어버릴 게 뻔해서 꿈을 꾸지 않기로 했다. 그런데 막상 걸음을 옮기고 나니까 냉장고에 남은 술이 있나 하고 생각해봤다. 술을 사면 3일 안에는 사라지곤 했다. 더 사야 하나 고민도 하고, 병에 담긴 술을 파는 가게를 넌지시 보기도 했지만, 지금 상태도 살짝 취한 상태라서 그냥 포기하고 발걸음을 원래 상태로 되돌렸다.

     

     

    집에 도착해서 문을 열면 보통 그 사람의 냄새가 나곤 했지만, 오사무의 집에서는 사람 냄새조차 나지 않았다. 오히려 빈집에 가구만 전시용으로 둔 것 같았다. 정리하지 않은 이불도 그대로였고, 창가에 대충 둔 알리섬이 든 화분,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싱크대, 단단히 닫힌 채로 혼자 돌아가고 있는 냉장고, 밤에 보면 귀신이 튀어나오게 열어둔 벽장마저 그대로였다. 그가 남긴 흔적이라고는 이게 전부였다. 채취는 아무것도 남기질 않았다. 오사무는 들어가자마자 냉장고 문을 열어서 술이 있나 고개를 살짝살짝 돌려봤다. 예상대로 술이 반만 담겨있는, 이미 먹은 술병과 새 술병 2개가 있었다. 구석에 게 통조림도 5개 있었다. 오사무는 오늘 이걸 전부 먹어버리자 싶어서 다 꺼냈다. 1인용의 아주 작은 둥그런 식탁에 술과 게 통조림을 두고, 싱크대 쪽으로 가서 깨끗한 작은 술잔과 젓가락을 꺼냈다. 순간 아차 싶어서 통조림을 까는 기구도 꺼냈다. 기구로 통조림을 안전하게 까고, 덜 마신 술병부터 뚜껑을 열어서 잔에 따랐다. 주변이 너무 조용한 나머지, 잔에 술이 담기는 소리가 크게 느껴졌다. 머리를 긁적이고는 술잔에 담긴 술을 단숨에 비웠다. 아까 먹은 양주와는 맛이 달랐다. 그리고 이상하게 전에 마신 술보다 마음이 더 편해졌다. 둥실둥실 떠오른 모든 것들을 다 억눌러준 느낌이었다. 없지 않게 속이 쓰린 느낌이 있었지만, 냉장고에서 꺼낸 지 얼마 안 된 술이 그 느낌마저 없애줬다. 속이 불타는 것 같은 느낌 역시 사라졌다. 양주가 몸에 맞질 않는 건가 싶었지만 그리 따지면 술 자체가 맞지 않는 것이었다. 잡다한 생각은 집어치우고 술잔에 담긴 술을 다시 목 뒤로 넘기고 숨을 푹 내쉬었다. 목구멍에 미끄러지듯이 들어가는 차갑고 달곰씁쓸한 술의 느낌이 마냥 싫지만은 않았다. 본디 쓴 것을 싫어하는 오사무였는데, 이상하게 술만큼은 싫지 않았다. 오히려 인생의 쓴맛이 더해서 술의 쓴 맛을 덜 느끼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니까 뭔가 살기가 싫어졌다. 술 다 마시고 콱 죽어버릴까 하는 극단적인 생각도 했다. 하지만 지금 그럴만한 상황이 짜여지지 않았다. 집 높이가 높은 것도 아니었고, 약도 다 떨어졌다. 지금은 죽을 수 있는 그럴만한 상황이 아니라서 그냥 술만 마시고 잠들기로 했다. 계속 목구멍으로 술을 넘기다 보니 목이 좀 쓰라리기도 했다. 사례라도 들렸나 했지만, 기침을 전혀 하지 않았다. 머리카락을 손으로 헝클어뜨리고 눈을 반쯤 감으니 시야가 흐릿했다. 책상 밑으로 편 다리 중 왼쪽 다리를 오른쪽 다리에 얹고 다시 술잔을 입에 대고 그 안에 담긴 술을 입에 머금었다. 그냥 훅 넘기지 않고 천천히, 혀로 굴리다가 타액과 입 안 온도에 섞여서 뜨듯해지자 이내 삼켰다. 목울대가 울렁이다가 이내 잠잠해지자 오사무는 눈을 끔뻑였다. 문득 창밖을 보니까, 거칠게 갉아 먹힌 초승달이라 해도 빛은 강하게 들어오고 있었다. 그 빛은, 구름조차 막지 못하고 자기 갈 길을 가다가다 오사무의 방에 들어오고 있었다. 오사무는 묘한 생각이 들어서 술을 9할 정도 담고 달빛이 들어오는 곳에 뒀다. 달빛을 받은 술잔은 입구 부분이 찌르르하게 빛을 머금고 있었고, 담긴 술은 마치 작은 연못가 같았다. 달빛을 받아도 술 맛은 그대로였다. 근데 뭐랄까, 마음이 더욱 편해졌다. 지금 바라보고 있는 밤하늘에 숨결을 내뱉어 그 숨결을 구름으로 만들 수 있을 정도였다. 아까 전까지 아무것도 담기지 않았던 눈동자에 달빛이 담겨서 살짝 생기가 돌아오고 있었다. 술을 마시며 달을 보다 문득 생각난 게 있었다. 붉은색 달, 본인이 암흑의 세계에 몸을 담그고 더럽히고 있었을 때의 보였던 달의 색깔은 항상 붉은색이었다. 마치, 제 삼자가 보는 오사무의 모습 같았다. 꽉 차고, 잔인하고, 냉정하고. 어느 하나 흠 잡을 곳 없고 모두가 두려워하는 존재인 최연소 간부 다자이 오사무를 뜻하는 것이었다. 다만 그건 제 삼자의 시선에 불과할 뿐이었다. 아무도 그의 속내를 들여다보거나, 진심을 알지 못했다. 그저 외적의 모습만 보고 감탄하고 두려워했다. 하지만 다자이 오사무는, 다자이 오사무 본인조차 두려워했다. 그리한 나머지 혼자 날뛰곤 했는데, 그런 오사무를 붙잡아준 존재는 한 명 뿐이었다. 익살을 들킨 것 같아 두려워하는 게 본래였지만, 이상하게도 아니었다. 눈을 뜨고 찬찬히 바라보다가, 이내 슬픈 얼굴을 했다. 사람에 대해 무색하고, 사람과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그가 변하게 된 계기이기도 했다. 그 뒤로부터 그와 자주 붙어 다니는 걸 좋아했고, 그의 곁에 있으면 영락없는 어린아이가 되곤 했다. 그와 같이 있음으로써 오사무는 마음의 안정을 얻었고, 마음만이라도 간신히 인간실격이라는 것에 벗어날 수 있을 줄 알았지만, 그와 함께한 순간은 순간일 뿐이었다. 그와 함께함으로써, 그 없이는 아무것도 못 하는 건가 하는 마음에 또다시 휘둘리고 홀로 갈등했다. 털어놓지도 못하고 혼자 끙끙 앓고 갈수록 무거워지는 고개만 푹 숙였다. 고개를 숙이니 눈물이 또 떨어질 것만 같았다. 고개를 다시 들다가 이내 뒤로 훅 넘어갔다. 목조차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취한 건가, 그리 생각하고는 술을 또 입안에 머금는 아이러니한 행동을 했다. 취했다 싶으면 그만 마시자 할법한데, 아예 필름이 끊길 때 까지 마시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오사무는 술병을 바라보다가 다시 그 병을 들어 술잔에 부었다. 취했는데 아직도 병을 입에 대고 들이키지 않는 게 신기했다. 아무리 그래도 술은 조금씩 천천히 먹고 싶은 거니까. 손가락으로 코를 톡톡 건드리다가 다시 술을 입안으로 바로 넘겼다. 코를 톡톡 거리는 걸 빼고, 술만 마시는 과정을 반복하니, 어느새 게 통조림은 까맣게 잊은 후였다. 게 통조림 내용물을 하나 꺼내서 입에 넣고 오물거렸는데, 술과 다르게 달콤하고 약간의 비린내가 났다. 거의 꾸벅꾸벅 졸듯이 먹으니, 하나를 순식간에 비웠다. 근데 이상하게, 그리 좋아하던 게 통조림이었는데, 한 캔 만에 금방 질려버렸다. 게 통조림을 냉장고에 넣으려고 하면, 비틀거리다 책상을 차버릴 것 같아서 관두기로 했다. 어느새 한 병 남은 술 뚜껑을 열고 잔에 따랐다. 냉기가 싹 가신 술은 미지근했다. 여기서 조금만 더 데우면 타액과 비슷한 온도였다. 오사무는 눈을 끔뻑이다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다시 응시했다. 눈이 부신 달빛은 가실 생각을 하지 않았다. 비참하게 하려는 의도인지, 아니면 따듯함을 안겨주려는 건지 알 수 없는 의도로 방 한편을 빛내고 있었다. 오사무는 무언가에 이끌린 듯이, 술이 찰랑하게 들어있는 잔을 다시 달빛이 자리를 잡은 곳에 뒀다. 다다미의 그림자가 드러나고, 술잔에서 나오는 그림자가 점점 길어지고 있을 즈음, 오사무는 다시 술잔을 제 쪽으로 끌었다. 술 한 방울이 흘러나와 다다미를 적시고, 오사무는 깔끔하게 그걸 무시하고 술잔을 입에 물었다. 바닥에 묻은 술을 개처럼 핥아 먹을 정도로 그리 추잡해진 건 아니었다. 고개를 살짝 스트레칭 하듯이 돌리니 머리 안에서 무언가가 느릿하게 움직였다. 뜨거운 액체로 추정됐다. 뇌수인가, 갈수록 아리송했다. 푸슬거리는 머리를 긁적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술을 반병쯤 비울 즈음, 취기가 수면 위로 드러났다. 시야가 더욱 흐릿해지고, 의식이 갈피를 잡기 어려울 정도가 됐다. 오사무는 작고 소리 없이 숨만 뱉는 트림을 내놓고 인상을 살짝 구겼다. 속이 아려오고 점점 숨이 막혀왔다. 뱃속의 90%를 술로 채우니까 생각보다 버거웠다. 금방이라도 토한 것 마냥 숨을 몰아쉬고는 생리적으로 고인 눈물을 흘려보냈다.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식탁에는 술이 몇 방울 흘려져 있었고, 빈 술병과 게 통조림이 놓여 있었다. 두어 번의 딸꾹질을 한 후에 숨을 내쉬고 잔기침을 했다. 다음날 혼자 술병을 앓을 생각 하니 슬슬 비참해지기도 했다. 옛날에 취할 정도로 술을 마시면 누가 부축해줬는데, 문득 생각이 나고 갑작스러운 후회감이 들었다. 왜 취기를 빌려서라도 말하지 못했을까, 본인이 이렇게 겁 많은 사람이었던가. 지금은 왜 말할 수 있을까. 그가 없다는 이유일까. 그리 생각하니까 생리적인 눈물이 아닌, 감정이 드러난 눈물이 왈칵 고였다. 헉하고 숨이 들이켜지고 입을 꾹 틀어막았다. 구토감은 아니었지만, 무언가 올라왔다. 표정이 일그러지고 고개가 푹 숙여졌다. 발을 슬 움직이니 바닥이 푹신했다. 구름을 밟는 것 같은 감촉이었다. 오사무는 취기로 인한 현상마저 슬프게 느꼈다. 지금 상태로는, 마치 자기가 죽은 것 같았다. 현실로는 그저 물로만 이루어져 있는 구름 위에 푹신하게 앉아있는 듯한 감촉, 눈앞에 아른거리는 그. 어째서일까, 왜 죽음을 체험하고 있는데 죽은 그가 보이지 않는 걸까. 확 달려가서 붙잡고 싶었다. 붙잡아서 꼬옥 안고 싶었다. 그의 품에 안겨서 엉엉 울고 싶었다. 공기를 확 끌어안는 게 아닌, 그의 몸과 온기를 끌어안고 놓고 싶지 않았다. 목을 울려서 목소리를 내고 싶었다. 그의 이름을 부르고 싶었다. 평소에 부르던 애칭으로 부르고 싶었다. 그리고 말하고 싶었다. 그가 들을 수 있게 말하고 싶었다. 말한 이후 늦게 말해서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거절해도 괜찮았다. 못 들은 거로 해도 괜찮았다. 그저 마음을 표현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했다. 말하지 못한 점을 이제는 후회하지 않고 싶었다. 만약 꿈에서 말한다면 하늘에 있는 그가 들을 수 있을까, 묘비 앞에서 말하면 듣는 상대는 그가 아니라 싸늘한 묘비다. 그러면 말해도 의미가 없었다. 오사무는 한숨을 쉬고 병을 잡은 후 거기 안에 남은 술을 한 번에 전부 마셔버렸다. 목구멍과 속이 아려왔고 숨이 거칠어졌다. 술을 마신 후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고 바로 다다미에 쓰러지듯이 누워 팔로 눈을 가렸다. 계속 흐르는 눈물은 붕대를 적셨다. 달빛은 점점 사라지고 있었고 새벽의 싸늘함이 불어오고 있었다. 몸이 움찔 떨리고 추위에 약한 숨결이 입 밖으로 힘없이 새어 나왔다. 오사무는 눈을 반쯤 뜬 후 한 손을 펼쳐 위로 뻗었다. 위에 멍하니 있는 손은 천장 일부를 가리고 있었고 오사무의 시야를 흐릿하게 했다. 정신이 흐릿해지고 잠이 올 즈음 누군가가 보였다. 눈에 생기는 있지만 웃고 있지 않았다. 평소의 무표정이었다. 옛날에는 어떤 얘기를 해도 항상 그 표정이었고, 변화라고는 눈썹을 살짝 올리는 정도에 그쳐서 잘 들어주지 않는 건가 하는 약간의 서운함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지금은 그 표정이 너무 좋았다. 오히려 평소의 무표정이 더욱 보고 싶었다. 흐릿했던 시야가 더욱 흐릿해지고 다시금 선명해지는 걸 반복했다. 눈 옆으로 무언가가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옅게 흐느끼는 소리도 들렸다. 잘못 들으면 귀신의 울음소리 같았다. 오사무는 본인의 울음소리를 처음으로 알았다. 손등으로 흐르는 눈물을 닦으면서 오사무는 계속 울었다. 아까 전까지는 그저 눈물만 흐르고 말았는데, 술에 완전히 취하고 나서야 제대로 울 수 있었다. 거의 쉰 목소리로 그의 이름만 계속 부르고 있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들리는 목소리도 없었다. 내 목소리는 전해질까, 내 목소리가 들릴까 하는 자그마한 생각은 오사무 혼자 가지고 있었다. 곁에 있으면 들을 수 있을 텐데, 그의 무릎에 머리를 대고 싶었다. 혼자 생각하며, 혼자 울다 지친 오사무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 오다사쿠..내 목소리 들려..? ..오다사쿠 좋아해..늦게 말해서 미안해..대답 안 해도 괜찮아.. 술기운 빌린 채로 말해서 미안해..진심이야.. ]

     

    흐느낀 목소리는 그 뒤로도 계속 이어졌다. 오사무는 그제야 모든 걸 다 털어놓은 기분이 들었다. 울고 있는 눈과 자연스레 올라간 입꼬리는 부자연스럽지 않았다. 옆으로 돌아누운 채로 힘없이 웃고 있었다. 다음날에 숙취가 오더라도 술을 마신 것에 대해 후회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 술을 마신 것이 다행인 거라고 생각했다. 비록 술기운을 빌렸다 해도, 오사무는 술기운에 의지해서 내놓는 진심이 아닌, 예전부터 쭈욱 생각한 진심을 드디어 토해냈다. 그가 들었을까 하는 건 필요 없었다. 그 생각을 하면 더욱 비참하고 말을 토해낸 본인이 싫어질 게 뻔했다. 푸슬 웃으면서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헤집었다. 취기와 흘린 눈물로 인하여 붉어진 얼굴은 웃고 있었다. 눈물자국이 가득했고, 살짝 부은 탓에 살짝살짝 감겼지만, 그래도 좋았다. 마음속에 굳게 남아있었던 응어리가, 4년 후에야 떨어졌다. 무언가에 홀린 듯이 잠든 오사무의 표정은 매우 평온했다. 마치 오다사쿠가 곁에 있는 것처럼 오사무의 몸은 알 수 없는 이유로 따듯해지고 있었다. 제아무리 싸늘한 새벽바람도 오사무의 몸을 차갑게 만들지 못했다.

     

     

    술로 인해 드러난 진심이 꿈으로도 전해졌는지, 오사무는 같은 꿈을 꿨다. 또 그를 만났다. 꿈을 꾸기 전 울면서 마음을 표한 상대였다. 하지만 더 이상 오사무는 꿈에서 그를 보고 굳지 않았다. 전보다 더 밝게 웃으며, 오다사쿠와 대화하고, 마음속에서 혼돈을 갖지 않았다. 진심만 담긴 모든 것을 내놓고 있었다. 오다사쿠도 그런 오사무의 마음과 진심을 모두 알고 있는지 다정하게 웃어주고 있었다. 두 사람만이 나오는 꿈의 배경은, 더 이상 아무것도 없고 색깔 하나 없는 흑백의 세계가 아니었다. 여전히 아무것도 없었지만, 점점 밝아지더니 이내 본연의 색을 되찾았다. 털어놓기 전에는 어딘가 답답했고 기뻐도 기쁨이란 게 뭔지 모른 채로 있었다. 느끼는 감정이 무슨 의미인지 몰랐고, 어떻게 형용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털어놓은 이후로는 완전히 달라졌다. 무슨 뜻인지 알았고, 형용하는 방법도 알았다. 오사무는 정말 오랜만에 행복이란 감정을 느꼈고, 그 감정을 소중히 여겨 어딘가에 버리는 불상사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꿈 안에서, 두 사람은 서로를 안고 있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약속이라도 한 듯이 눈을 감고 그저 껴안고만 있었다. 환희가 가득 차다 못해 이내 흐르는 오사무의 눈물은 오다사쿠의 어깨를 적셨고, 오다사쿠의 손은 오사무의 머리를 쓰다듬고 등을 토닥이고 있었다. 아무런 바람도 흩날리지 않고, 새가 지저귀거나 햇빛이 들어오는 그런 것도 없었다. 서로의 온기만으로 족했다. 말없이 서로를 껴안고만 있다가, 오사무는 다시 한 번 나직이 말했다.

     

    [ 좋아해, 오다사쿠. ]

     

    그의 반응은 예상하지 않았다. 대답도 기대하지 않았다. 말이라는 것은 대답이 필요한 것만 있는 게 아니었다. 뱉어놓은 말이 주인을 잃고 정처 없이 떠돌아도, 그것은 결국 말이란 존재였다. 주인을 잃지 않았지만 전달되는 사람이 없어도, 그건 그것대로 의미가 있었다. 의미가 없는 말은 없다. 오사무가 지금까지 살면서 내뱉은 말의 십중팔구는, 모두를 속이려고, 자신의 모습을 속이려고 낸 말들이었다. 아무도 그의 진심을 모르게끔, 하지만 오다사쿠는 오사무의 빈말을 잡아냈고, 오사무는 이를 받아들이고 이내 그 앞에서 진실만 담겨있는 말만 내뱉었다. 사소한 말 하나조차도 그와 함께 유희를 나누려는 목적이 있었다. 그만큼 좋았다. 거짓말은 1도 없는 대화는 생각보다 가벼웠고,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그야말로 편했다. 평생 이 대화만 하고 싶었지만 그래도 타인 앞에서 쉽사리 마음을 열지 못했다. 그 말의 의미는 그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그는 죽어버렸고, 꿈이 유일한 연결수단이었다. 그와 갑작스러운 이별을 하니까 모든 것이 처음으로 돌아간 것 같았고, 오직 그의 무덤에서 꾸며지지 않은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숨결뿐이었고, 말은 못했다. 묘비에 기댄 채로 내뱉은 숨결은, 오사무가 다시 약해졌다는 한탄이 담겨있었다. 그 나약함은 꿈으로도 남김없이 연결됐으며, 오사무는 다시 굳었다. 오다사쿠는 그대로였다. 똑같이 대한 오사무였는데, 오사무는 예전에 대한 오다사쿠를 잊어버렸다. 자기 혼자 굳고, 식은땀을 흘리고 무서워했다. 오다사쿠는 다시 그에게 처음 보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감정이 무슨 의미인지 몰라서 그 생각이 확대되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본인이 오다사쿠에게 가지고 있는 감정이 무엇인지 모르고 커지는 걸 잡지도 거두지도 않고 그냥 두고 있었다. 그럴수록 본인은 더 괴로워지고 힘들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감정이 무엇인지 몰라서 그냥 두고만 있었다. 술기운을 빌렸던 적은 있었다. 이 전에도, 하지만 취하지는 않아서 몰랐다. 술에 워낙 강했기에. 오늘은, 취할 정도로 마셨다. 그게 정점이었다. 술에 깜빡 취하고 나서 자신의 환각을 보고, 그제야 눈물을 흘리고, 감정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오다사쿠를 향한 감정을 표했다. 그러나 지금 이 와중에도 오사무는 술에 빌려 말한 자신의 진심이 오다사쿠에게 가벼이 느껴지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들었지만, 오다사쿠는 가볍지 않았다는 걸 알려주고 있는지 계속 오사무를 안고 있었다. 오사무의 온기는 꾸며진 것이 아니었다. 오다사쿠에게 주는 온기는 절대 꾸며진 것이 아니고, 오사무가 좋아서, 진심으로 기뻐서 나오는 온기였다. 건들면 차가울 것 같은 오사무의 몸은 정말로 따듯했다. 감기에 걸린 환자에서 나온 온기가 아니었다. 모든 진심을 토해낸 오사무는 마음이 정말로 편해지고, 다시 한 번 몸이 가벼워짐을 느꼈다. 그걸로 충분했다. 그걸로 오사무는 행복했다. 설령 깨어난다 해도 평생 잊지 않고, 꿈을 다시 꾸지 않더라도 좋았다. 욕심쟁이는 아니니까. 어떤 방법이든 감정을 표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좋았다. 미래의 오사무가 지금의 오사무를 어떻게 봐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라고 홀로 생각했다. 느릿하게 움직인 오사무의 눈동자는, 진심으로 웃고 있었다. 습기에 젖어 더욱 빛나보였다.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가지 않아도 좋았다.

     

    =====

     

    후기 : 안녕하세요, 작성자입니다, 원래 계획은 최대한 원작에 맞추려고 했는데 쓰다 보니까 점점 망상 대잔치가 됐네요. 신청하고 글을 작성하는 2주 동안 많이 고생했습니다. 처음으로 한 퇴고는 정말로 죽을 뻔 했지만 이내 요령을 알고 맞춤법 퇴고, 문맥 퇴고 순으로 천천히 해나갔습니다. 그리고 흐트러지는 집중력 때문에 방치한 경우도 많았지만 동기라도 얻고자 워드 프로그램 기준으로 쪽 페이지를 다니까 채워지는 쪽수에 역효과로 제가 무서워졌습니다..며칠은 슬럼프 때문에 몇 자 안 써져서 울고 싶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완성을 한 이후에도 퇴고를 또 하니까 이것저것 추가하고..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완성한 아주 의미 많은 글인 것 같습니다..제대로 한 오다자 연성은 처음이라서 이 글을 끝맺었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따름입니다. 현재 후기를 쓰는 제가 영영 안 보일 줄 알았는데 이리 멀쩡히 쓰고 있네요. 제가 사실 단편모음집을 보면서 개인적으로 흥미가 덜한 곳은 빨리 읽고 넘기는데 제 글이 그 모습이 되지 않을까 하고 걱정이 듭니다. 다자이 성우분인 미야노 마모루 분이 가수도 하셔서 곡을 자주 듣다가 Refrain을 들었는데 문스독으로 뒤덮인 제 뇌는 앗 이건 오다자다 해서 글을 써보고 싶다 생각을 했지만 미루기만 하고, 그런 제가 싫어져서 또 혼자 갉아먹던 와중에 합작이 보여서 이걸 빌미로 써보자 싶어서 쓰게 됐고 지금의 글이 완성됐습니다. 마치 다자이가 실제로 그리 말하는 기분도 들고, 실제 곡의 끝은 만나고 싶어. 라고 끝났지만 여기서는 조금 틀어서 모든 걸 다 드러낸 다자이가 오다사쿠를 만난 걸로 끝을 맺었습니다. 아무도 믿지 못하고 그저 익살로 모든 걸 무마하는 다자이의 유일한 벗인 만큼 그 존재는 소중하니까요. 이만 후기를 줄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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