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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월 | 상흔傷痕의 영榮COLLABORATION/WRITING 2018. 12. 28. 11:47
여느 때와 같은 저녁이었다. 여전히 탐정사에서 신입을 맡고 있는 아츠시는 사무실에서 휴대폰을 붙들고 앉아 있었다. 벌써 여섯 번째 전화이건만, 아츠시가 통화를 시도한 휴대폰의 주인은 통 전화를 받을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 사람―다자이 씨의 성격에 귀찮은 전화를 받고 싶지 않다면 아예 전원을 꺼버리지 않았을까? 아츠시는 머릿속에 맴도는 이 한 가지 의문 탓에 괜한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결국 턱을 눌러 잡던 손가락이 다시 한번 다자이의 전화번호를 꾹꾹 누른다. 신호음이 한참을 울리지만 여전히 통화는 연결되지 않는다. 혹시 또 입수하셨나, 싶은 생각에 아츠시가 끄응 앓는 소리를 했다. 강물에 빠졌다면 휴대폰이 망가져 애초부터 신호가 가지 않았을 텐데. 그는 한숨을 내쉬며 휴대폰에서 귀를 떼었다. 외근과 휴가로 아무도 없는 탐정사인지라 한숨 소리가 더욱 무겁게 탐정사 바닥을 휩쓰는 듯했다. 눈을 끔뻑거리던 아츠시가 다시금 연결을 시도하는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았다. 이제 어떻게 하나 싶다.
우웅, 하는 진동 소리가 들렸다. 아까까지만 해도 눈치채지 못했던 소리다. 아츠시는 소리가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자이의 자리 근처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살금살금 다가갔다. 서너 걸음 정도 다가가자, 책상 위에서 진동하는 휴대폰이 보였다. 적절하게 배치된 컴퓨터와 쌓여 있는 서류 더미에 가려, 아츠시가 앉았던 자리에서는 미묘하게 보이지 않는 위치. 덕분에 눈치채지 못했던 것 같다. 아츠시가 제 휴대폰을 끈 다음 책상 위에 있던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확인해 보자 수신자가 자신인 부재중 전화가 쌓여 있었다. 저장된 건 아니었기에 제 전화번호만이 단정히 적혀 있을 뿐이지만, 수신이 간 것으로 미루어 보면 의심할 것 없이 그가 찾던 남자의 휴대폰이었다. 일부러 두고 간 것인지, 잊어버린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아츠시에게 이제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현재 행방이 묘연한 남자, 다자이 오사무가 두고 간 휴대폰을 가져다 주는 것이다.
루팡에는 창문이 없다. 다시 말하자면, 시간 개념 따위는 루팡에서 기대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러나저러나 다자이에게는 큰 상관이 없었다. 그는 할당량의 일조차 파트너에게 이렇다 말도 없이 원하는 시기에 원하는 방법으로 해결해 버릴 만큼 제멋대로 움직이는 남자였으니. 사실 오늘도 새로운 자살법을 시험하겠다는 것을 핑계 삼아 아침 회의를 넘긴 뒤, 줄곧 요코하마 거리를 서성였다. 그러다 저녁 어스름이 시내를 덮어 안는 시간이 되자, 루팡으로 슬그머니 기어들어 온 것이 아까 전이었다. 아무 기별도 없이 바 의자에 앉아 있던 다자이에게, 마스터는 마찬가지로 아무 말 없이 그가 늘 주문하던 술을 두 잔, 얼음과 함께 바 위에 올려 주었다. 마스터가 제 일을 하러 사라지자 다자이는 오른쪽에 사진 한 장을 보이지 않도록 뒤집어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그 위에다 남은 한 잔을 올리더니 요코하마 시내 어딘가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이름 모를 꽃집에서 사 온, 줄기를 짧게 자른 국화 한 송이를 꽂았다. 얼음과 유리잔 사이로 줄기가 매끄럽게 비집고 들어가며 잔 바닥에 닿는다. 싱싱한 녹색 줄기가 샛노란 빛깔을 띠는 술에 쌓여 금방 사그라들 것 같은 황색으로 보였다. 그래도 꽃은 여전히 활짝 피어 있다 보니, 바에 작은 꽃병을 하나 올려 장식한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오늘 갓 만개한 국화라고 했다. 꼭 흰 빛깔의 생화를 잘라 달라고 부탁하던 다자이에게 꽃집 주인은 복잡한 표정을 보였었다. 달리 표정을 읽으려고 애쓴 것도 아니건만, 훤히 드러나는 표정에서 자신이 장례식이라도 방문한다고 지레짐작했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래서인가, 얼굴에 아무런 그늘도 없이 빙그레 웃으며 흰 국화를 부탁하는 모양새가 주인에게 조금 이상하게 비추어진 것 같다. 국화를 가져다 주면서도 수상쩍게 자신을 바라보는 눈초리가 집요하고 따갑다. 불편한 시선에도 다자이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를 건넨 뒤에 꽃집을 냉큼 빠져 나왔었다. 다행히 문을 닫고 나오고 나니 주인의 시선이 주던 애매한 무례함도 사라졌다. 닫힌 문에 가로막혀 그가 느끼지 못하였기 때문이거나, 주인이 꽃으로 관심을 돌려서일 터였다. 다자이는 꽃집 옆으로 난 골목을 따라 몇 걸음을 더 걸었다. 그 잠깐 새 손에 쥔 국화가 악력에 조금 시든 듯했다. 다자이는 잠깐 고민하다가, 국화의 형상이 구겨지지 않도록 조심해서 주머니에 넣었다. 국화가 주머니 속에서 자리를 잡았다. 더 망가지지 않을 것 같다.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다자이는 그 길로 다시 요코하마에서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한적한 거리를 찾아 돌아다녔던 것이다.
오다 사쿠, 오늘은 사실 자살을 시도하지 않았다네.
사람의 기척이 없어 삭막하던 공간에서 그가 낸 소리가 공기를 울렸다. 차분하고 진지한 목소리로 천천히 한 마디를 내뱉은 그는 손가락 끝으로 애꿎은 얼음만 꾹꾹 눌렀다. 얼음이 술잔 바닥에 긁히며 제법 시끄러운 소리를 낸다. 땡그랑, 맑고 날카로운 소리가 오래 이어지다 끊겼지만 다자이의 얼굴에는 시종일관 웃음기가 담긴다. 어떠한 칭찬도, 충고도, 하다못해 '그래'와 같은 시시한 호응조차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 그는 가끔 주인 없이 덩그러니 놓인 다른 한 잔을 향해 말을 걸곤 했다. 괜히 말을 걸고서 이렇게 얼음을 튕기며 소리를 내는 것도 작은 심술이었다. ‘나는 이 시끄러운 소리에 집중하느라 대답을 듣지 못했습니다,’ 따위의 듣는 이 없는 시위인 것이다. 그래도 그렇군, 하는 목소리를 들은 것 같기도 해 다자이가 무심코 고개를 돌린다. 주인 없이 빈 자리 앞에 벌써 녹아서 술과 섞이기 시작하는 얼음 조각만 놓여 있다. 다자이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잔을 가만히 응시했다. 생각해 보면 당시에도 오늘, 그러니까 현재처럼 이렇게 혼자 앉아 있던 날이 있곤 했다. 머리 하나는 잘 돌아가는 다자이였지만, 그의 벗이 언제 시간이 나고 마음이 동해 루팡에 들를지는 그로서도 예상 밖이었다. 머릿속이라도 들여다보지 않는 이상 그건 아무런 규칙도 예고도 없이 벌어지는, 말 그대로 우연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다자이가 머리가 비상한 만큼 감도 좋았던 탓에 그가 루팡으로 걸음 하는 날에는 대체로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었다. 그런 날이면 다자이는 언제나―올 줄은 어떻게 알고 기다렸냐는 말에 가벼운 웃음으로 말했었다. 오늘 이곳에 오면 자네들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네.
다자이의 오른편에 두었던 술잔에 손가락이, 이어서 손바닥이 휘감겼다. 그는 술을 마시려다 말고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곁을 바라보는 까만 눈동자에 암붉은색 머리카락이 담긴다. 의자를 끌어내 앉은 사내가 자연스럽게 술잔을 기울였다. 사내가 술을 입에 쭉 털어 넣은 다음 자신을 쳐다보는 모습이, 마치 무슨 문제가 있는지 묻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다자이는 바람 빠진 소리를 내 웃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오다 사쿠. 오늘은 좀 늦게까지 일한 것 같은데?"
"아, 조금 늑장 부리다 왔을 뿐이다."
그 오다 사쿠가 말이지. 어지간히도 귀찮은 일이었나 보군그래. 다자이의 목소리가 술에 젖어 매끄럽게 생기가 돌았다. 점잖게 재미있는 말을 하는 오다 사쿠노스케의 대꾸에 신이 난 것 같기도 하다. 평소와 같이 빙긋 웃으며 술을 홀짝이는 다자이에, 오다 사쿠가 빈 잔을 바 안으로 죽 밀어 넣으며 물었다.
"언제부터 있었던 거지?"
"아마 1시간은 족히 있었던 것 같네, 자네가 오지 않았으면 막 일어설 참이었지."
"아…, 그런가."
싱거운 대답이었다. 다자이가 오다 사쿠라는 사내에게서 가장 좋아하는 점이기도 했다. 솔직하고, 담백하며, 꾸밈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무례한 것도 아니다. 오다 사쿠는 아마 다자이가 아는 누구보다도, 다자이 자신이 그어 둔 선을 존중할 줄 아는 남자였으니. 다자이가 어떤 말을 해도 가만히 들어 주기만 했으며 어떤 행동을 해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하고 따라 주는, 싱겁고도 재미없는 남자. 그 점이 즐겁고도 재미있는 부분이었다.
"아, 오늘 꽤 흥미로운 자살법을 알아냈다네."
"자살법 말인가?"
그래, 자살법. 다자이가 눈을 빛내며 하는 말의 십중팔구는 자살과 관련된 것이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 오다 사쿠가 다자이를 처음 알게 된 순간부터 그가 끊임없이 갈구하던 것이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지금까지 얻지 못한 것. 영원한 안식, 죽음이다. 덕분에 오다 사쿠는 그가 이렇게 눈을 반짝이며 말해 보았자 다음날이면 멀쩡하게 다시 루팡에 앉아 있을 것을 막연하게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런 확신이 오다 사쿠로서는 떨떠름하면서도 안도할 수 있는 점이었기에 다자이가 이른 나이에 죽음을 동경하고 있다고 해도 조용히 넘어갈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그가 눈을 빛내면서 이야기하는 얼마 되지 않는 소재라는 것도 침묵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후일 어느 날에는 그 외에도 다른 것으로 빛나는 그를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지금 당장은. 오다 사쿠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는 것처럼, 조용히 침묵하던 다자이가 가볍게 웃더니 입을 다시 열었다.
"꽃을 이용한 자살법이네."
"꽃?"
"그래, 꽃이 밤에는 호흡한다는 사실을 이용한 것이지."
다자이는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고개를 살짝 치켜들어 천장과 벽 사이를 보고 말했다. 완전히 밀폐된 방 안에 꽃을 가득 들여놓는 거야. 그런 다음 그 한가운데 누워 잠을 청하는 거지. 그러면 꽃이 호흡하면서 밀폐된 곳의 산소를 전부 집어 삼켜버릴 것이고, 그럼 그 방 안에 누워 자던 사람은 그 상태로 질식사하게 되는 것이네. 술잔 안에서 굴러다니는 얼음을 툭툭 치던 다자이의 손이 순간 멎더니, 그가 문득 고개를 돌린다. 자연스럽게 그를 응시하고 있던 오다 사쿠와 눈이 마주쳤다. 눈동자 사이에 서로가 비친다. 푸른 눈동자에 검은 점이 맺혔다. 얕게 숨을 들이마신 다자이가 가라앉은 공기 속에 잔잔한 파동을 만든다.
"흥미로운 방법이지 않은가?"
"그렇군."
"하고 싶은 말은 그게 다인가. 재미없는 남자 같으니라고, 오다 사쿠."
쿡쿡 웃는 소리가 다자이의 입안에서 맴돌았다. 어떠한 감정도 비치지 않고 형식적인 느낌으로 하는 대답도, 무얼 어떻게 더 반응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자신만 쳐다보고 있는 눈빛도, 그에게는 오다 사쿠라는 사내와 함께하고 있다는 분명한 느낌을 주어 더욱 즐겁게 했다. 다시 술로 채워진 잔을 들며 다자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쁘진 않지만, 너무 오랜 시간 기다려야 한다는 점이 마음에 걸리네. 그러다가 숨이 막혀 잠에서 깨 버리면 실패 아닌가."
고통스러운 건 싫으니 말일세. 다자이는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오다 사쿠 쪽으로 잔을 기울였다. 더 말하지 않는 것인가, 싶어 자신과 잔을 번갈아 두어 번 쳐다보던 오다 사쿠가 한발 늦게 다자이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자신의 잔을 들었다.
"오늘은 무엇에 건배하지?"
"글쎄, 우리가 만난 것을 기념하도록 할까?"
"그렇군, 그것도 좋다."
그럼 그걸로 하지. 다자이가 잔을 앞으로 내밀었다. 쨍, 유리가 부딪치는 맑은 소리가 들렸다.
쨍, 다자이가 뻗은 손끝에서 유리잔 두 개가 부딪쳤다. 바 위에 얌전히 자리하고 있던 술잔이 옆으로 조금 밀리자, 그 반동으로 꽂혀 있던 국화가 작은 원을 그리며 돌았다. 잔 안에 담긴 황금색 술도 얼음 표면과 줄기를 따라 요동을 친다. 다자이는 잔 바닥으로 곧게 뻗은 줄기를 따라 빠르게 미끄러져 내려가는 액체 방울을 응시했다. 술잔에 일어난 작은 파동이 수그러들자, 그제서야 다자이가 손을 거둔다. 오늘은, 내가 오랜만에 루팡에 걸음 한 것을 기념하도록 하지. 그가 허공에 단어를 흩뿌렸다. 듣는 이 없어 방황하던 목소리가 벽과 바닥과 천장에 부딪혀 사라졌다. 침묵 속에서 다자이는 미동 없이 앉아 있다가, 잔에 남아 있는 술을 단번에 들이키더니 빈 잔을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잔 바닥이 받침과 부딪치는 쨍깡, 소리에 휴식을 취하고 있던 마스터가 고개를 빼 쳐다보았다. 다자이가 그를 불러 리필을 부탁한다. 다시 잔이 꽉 차자 그는 텅 빈 옆 자리를 보았다. 여전히 인기척은 다자이의 것 하나뿐이지만, 그는 어쩐지 누군가 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엔 자살 얘기를 하러 온 게 아닐세, 자네에게 해 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거든.
그런가? 진지한 대답이 희미하게 들리는 듯하다. 다자이는 눈을 감고 다시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입가에 잔잔히 미소가 맺힌다. 그래, 다른 얘기지. 그럼 집중해서 들어야겠군. 그리운 목소리가 다자이의 귓가에서 맴돌다 증발했다. 그는 목소리의 잔향이 위태롭게 바 안에서 흩어지는 것을 음미하더니, 한참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사람 하나를 구했어, 시설에서 쫓겨난 고아였지. 자네가 고아를 보살피던 게 생각나더군. 아, 자네가 보살피던 아이들보다는 훨씬 나이가 많았네. 10대 후반쯤 됐을까? 며칠을 꼬박 굶었는데도 강에 떠내려가는 나를 구해 주더라고. 심성이 착하고 곧은 아이야, 시설에서 받았던 학대로 자존감이 낮은 게 작은 흠이지만. 지금 말인가, 오다 사쿠? 지금은 탐정사에서 잘 지내고 있어. 일도 빠르게 잘 배워 가고, 저 스스로 판단해서 다른 사람을 구해 온 적도 있어. 그림자도 많이 걷힌 것 같더군. 그러고 나니 웃는 얼굴이 제법 보기 좋더란 말이지. 아쿠타가와 군과 상성도 잘 맞아서, 더 자라고 나면 손발이 잘 맞는 콤비가 되지 않을까 하고 있네.
네가 미래에 기대하는 모습은 처음 보는군.
어? 다자이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기대했던 것보다도 생생한 목소리였다. 그는 눈을 깜빡이다 급하게 홱 고개를 돌렸다. 제 오른편에서, 바의 탁자에 팔을 걸친 사내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입가에 잔잔한, 그러나 깊은 무게를 담은 미소를 띠며, 사내는 손가락 끝으로 술잔에 꽂힌 국화를 톡 쳤다. 국화가 손가락 끝에서 작게 흔들렸다.
늘 하는 시답잖은 자살 얘기보다 훨씬 듣기가 좋아.
술잔을 들고 있던 다자이의 손이 마치 사진처럼 멈추었다. 다자이는 멍하게 입을 벌리고 오다 사쿠를 바라보았다. 그건 조금 생각지 못했던 대답이었는데. 어색한 침묵이 돌았다. 세상의 모든 소리가 사라지는 것 같은 착각에 머리가 굳어 다자이는 대답하지 않는다. 가만히 눈을 깜빡이던 그의 시야에서 어느 순간 사내의 형상이 사라졌다. 어떠한 일도 일어난 적 없었던 것처럼, 모든 것이 처음 다자이가 들어온 그대로였다. 그러나 그는 의자 위에 온기가 남아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한 번 괜한 생각이 들자 목소리가 다시금 생생하게 그의 머릿속에 맴돌았다. 듣기 좋다, 라. 사내의 말을 천천히 곱씹어 보던 다자이가 곧 환하게 눈을 접어 웃었다.
자네와 이야기하는 건 역시 재미있어.
땅거미가 요코하마 위를 가득 덮었다. 해는 벌써 서산 너머로 사라져, 이제 하늘을 쳐다보면 보이는 것은 붉게 가라앉은 태양빛의 흔적뿐이다. 아츠시는 정처 없이 요코하마 시내를 걸었다. 목적이라곤 누군가를 찾는 것을 제외하자면 없었기 때문에, 그가 한적한 골목 사이로 들어간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아츠시의 짧은 추리력에 기대었을 때 다자이가 있을 것 같지는 않은 작고 어두운 골목이었다. 밤거리였기 때문인지 더욱 어두웠다. 음산한 분위기는 아닌 것이 다행이었다. 그랬더라면 아츠시는 아마도 두어 걸음 나아갔다가, 위험한 일에 말려들기 싫다며 재빠르게 뒤로 돌아 나가 버렸을 것이다. 안으로, 안으로 들어가던 그의 시야에 팻말 하나가 잡혔다. 붉은 배경의 직사각형 안에 Lupin이라는 이름이 흰색으로 단정하게 적혀 있었다. 조금 오래된 느낌, 그러나 촌스럽지 않은 디자인이었다. 아츠시는 자리에 서서 팻말을 응시했다. 팻말만 봐서는 어떤 가게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어떤 마음이 든 것인지는 모르나―순전히 호기심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더 미묘한,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었다. 아츠시는 팻말 아래를 지나쳐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은은한 전등이 지하로 향하는 계단을 비추고 있었다. 그는 아래로 발을 디뎠다. 체중에 눌린 계단이 투박한 소리를 내며 울었다. 한 번 진로를 꺾어 내려가니 아츠시의 눈앞에 바의 풍경이 보였다. 목재로 보이는 상과 의자, 차분한 느낌의 조명. 역시 오래된 느낌의 풍경이었다. 옛날 사진 속 배경으로 들어간 것 같았다. 아츠시는 눈으로 바 안을 훑다가 익숙한 밤갈색 코트를 입은 남자의 뒷모습을 발견했다.
아이의 이름 말인가?
다자이의 옆에는, 흰 국화가 꽂힌 술잔 하나가 놓여 있었다. 꽤 오래 놓여 있었는지 안에 담겨 있던 얼음이 형체를 뭉개며 녹아내리고 있었다. 국화도 약간 시든 것 같았다. 어쨌든 그것을 제외하자면 이곳에 사람이라곤 없었다. 그 탓에 아츠시로서는 그가 누구에게 말을 걸고 있는지 모를 노릇이다. 상당히 열중한 건지,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건지. 아츠시가 몇 걸음 다가갔는데도 다자이는 눈치챘다는 기별을 주지 않았다. 이름을 부를까, 고민하던 아츠시의 귀에 이름 하나가 꽂혔다.
나카지마 아츠시.
본인의 이름이었다. 아츠시는 화들짝 놀라 펄쩍 뛰어오르며 큰 소리로 네! 하고 대답했다. 큰 소리에 잠깐 멈칫한 듯 보이던 다자이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아츠시를 바라보았다. 평소와 같이 능글거리는 웃음을 얼굴에 만연히 띄운 모습이었다.
"아츠시 군, 여긴 어떻게 찾은 거지?"
"아…,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들어왔어요."
알고 찾았을 리가 없지. 알고도 물어본 질문이지만 싱거운 대답이다. 뭐, 상관없나. 다자이가 어깨를 으쓱 하더니 몸을 돌려 아츠시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뻣뻣하게 긴장한 채 서 있는 아츠시의 꼴이 아직 덜 큰 어린아이 같아 우습고도 귀엽다. 다자이는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내려놓고 말했다.
"보아하니 나를 찾아 다닌 모양이군. 용건이 뭐지?"
"아, 맞다! 이거 전해드리러 왔어요."
아츠시가 주머니를 뒤지며 뭔가를 꺼낸다. 다자이는 아츠시가 물건을 손으로 건넬 때까지 지켜보다가 팔을 뻗었다. 다자이의 손 위에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팔을 가져와 살펴보자 휴대폰이다. 사무실에 두고 가셨더라고요, 아츠시의 말에도 다자이는 휴대폰만 빤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설마 이걸 주겠다고 이 저녁에 거리를 돌아다닌 건가, 사람이 너무 올바르면 멍청한 구석이 있다고 하더니 그런 느낌인지도 모르겠군. 영양가 없는 생각을 이어 가던 다자이는 휴대폰을 켰다. 화면을 열자 부재중 전화가 여러 통 걸려 와 있었다. 저장되지 않은 번호였다. 더 생각해 볼 것 없이 아츠시일 것이다. 그러나 다자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화면의 부재중 전화 표시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 굳은 모습으로 가만히 있는 다자이를 보던 아츠시가, 조그만 목소리로 덧붙여 말했다. 걱정했다고요, 다자이 씨…. 소심한 소년의 목소리 위로 더 낮고 굵은 소리가 겹쳐 들린다. 걱정했는데 다행이군.
이렇다 할 대답이 없어 아츠시는 다시 다자이 씨, 하고 불렀다. 잠깐 뜸을 들이던 다자이가 고개를 든다. 아츠시는 그 순간 다자이가 웃은 것 같았다. 그러나 그가 이상함을 눈치채기도 전에 다자이는 익살스럽게 한 번 방긋, 웃어 보이더니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자네는 내가 이런 것 없이도 멀쩡히 돌아다닐 수 있다는 걸 모르는 건가?"
"그게 아니고요! 두고 가셨길래 그냥 갖다 드려야겠다고 생각한 것뿐이에요…."
"이거 내가 괜히 고생시킨 것 같군."
그가 빙그레 웃으며 점잖게 대답했다. 아츠시가 그를 바라보더니 손을 휘적거리며 아니라고 반응한다. 다자이는 제가 그런 것뿐이에요, 하고 허둥거리며 대답하는 아츠시를 지켜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괜찮네, 바닥에 낮게 깔리는 차분한 음색에 아츠시가 움직임을 그쳤다. 다자이는 휴대폰을 주머니 안에 집어넣었다. 손을 천천히 내리며, 멍하게 다자이를 쳐다보던 아츠시의 귀에 다시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서 숙소까지 제법 거리도 있고, 오늘은 여유도 있으니 저녁은 내가 사지."
"…정말 그래도 되나요?"
"아츠시 군…, 영 못 미더운 표정이네만."
아츠시가 설마 정말 몰라서 그러냐는 표정을 지었다. 다자이 씨한테 밀린 외상이 한두 개여야죠. 꿍얼거리는 목소리가 바 안 공기를 울린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다자이는 뻔뻔스레 대꾸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선배를 좀 신뢰하게나, 아츠시 군. 상처받았다는 걸 드러내듯 과장스럽게 퉁명을 담은 목소리가 허공에서 크게 울린다. 그래도 아츠시는 어딘가 덜 풀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다자이의 손이 오른편을 향했다. 그가 겉면이 약간 젖은 술잔 밑에서 손가락으로 작은 인화지 한 장을 끄집어낸다. 아츠시가 그게 뭔지 관찰하기도 전에 종이는 반대편이 보이지 않도록 뒤집힌 채 다자이의 품속으로 들어갔다.
"사진인가요?"
"이것 말인가? 그렇네만."
"누구 사진이에요?"
"별 게 다 궁금한 후배로군."
"실례라면 죄송합니다…."
친구일세. 다자이가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고 아츠시를 지나쳐 걸었다. 걸음에 맞추어 코트가 좌우로 흔들렸다. 아츠시는 그 자리에 서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무언가 궁금증이 덜 풀려 고개를 기우뚱, 하더니 결국은 으음…하는 작은 신음소리를 냈다. 그가 한참 고민하면서 서 있다는 것을 눈치챈 것인지, 타이밍 좋게 “거짓말이네,” 하는 대꾸가 그의 귓속으로 매끄럽게 들어왔다. 에엑? 하는 원망 섞인 목소리가 되돌아온다. 다자이는 가볍게 소리 내어 웃더니 기다리지 않고 먼저 계단을 올라갔다. 아츠시는 그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다가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아무도 없는 풍경 속, 내용물이 다 빈 술잔과 그 곁에 하얀 국화가 꽂힌 술잔 둘만이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아츠시는 어쩐지 비밀을 한가득 담은 것 같아 보이는 술잔에 시선을 고정하다가 무언가 위화감을 느낀다. 잠깐 동안 무엇이 이상한 건가 싶어 풍경을 빤히 관찰하던 아츠시가 눈을 내려 의자를 보더니 그제야 아, 하는 외마디를 낸다. 국화가 꽂힌 술잔 쪽 자리에, 마치 누군가 앉았다 간 것처럼 의자가 바깥으로 조금 삐져나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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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Fla의 리메이크 곡 See You Again & One Call Away를 주제로 하여 쓴 글입니다. 노래 가사 중 We've come a long way from where we begin(우리가 처음 시작했던 곳에서부터 멀리도 걸어왔네) 파트가 2쿨 엔딩곡 바람이 부는 거리를 닮았다고 생각해 합작 주제를 보자마자 이걸로 택했던 것 같아요.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은 모두 들어갔으나 분위기는 마음대로 되지 못한 게 조금 아쉽네요…. 노래와는 분위기가 조금 차이가 나는 거 같아서 들으면서 보시는 걸 그리 추천하진 않겠습니다. 아, 제가 표현하고자 했던 가사나 내용은 읽으시는 여러분이 직접 찾으시는 편이 더 좋을 것 같아요! 제 의도대로 전달되어도 좋고, 아니어도 여러분만의 해석이 담기는 편이 더욱 여러분께 가치 있는 글로 다가갈 테니까요 :)…. 그러니까, 그래서 오다 사쿠가 정말 있었던 거야 아닌 거야, 라는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절대로 정하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사실 중반부 고민을 정말 많이 했어요. 제 캐릭터 해석은 다른 분들에 비해 좀 더 밝고 미래지향적이라고 생각해서 혹시 캐릭터 붕괴를 야기하지 않을까…같은 고민을 많이 했거든요. 그런데 역시 미래를 바라보는 모습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서 제 고집을 좀 밀고 나갔습니다. 캐붕은 최대한 줄였다고 생각하는데 그래도 여러분이 보기에 어떨지는 잘 모르겠네요…역량 부족입니다, 반성하겠습니다ㅠㅠ!
글러로서, 또 연성러로서는 처음 참여하는 대규모 합작이라 더욱 열심히 썼습니다. 그 부분에서는 후회 없이 글을 쓸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나름대로 성장할 수 있는 시간이었던 거 같기도 하고요. 다른 참여자 분들의 글도 하나같이 보배롭고 주옥 같으니 한 번 둘러보시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아니, 꼭 좋을 거라고 제가 장담해요 :D! 마지막으로 언제나처럼 제 글을 보고 좋아해 주시는 여러분들에게도 감사를 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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